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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그리이스어로 '디아드(dyad)'라 불리는 숫자 2는
모든 창조 과정의 기초를 이루는 수입니다.
여기에서 창조란
하나로부터 분열을 거치면서
새로운 통합으로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옛날에는 모나드(1)와 디아드(2)를
모든 수들의 부모라 생각했으며
1과 2라는 부모로부터
자녀들의 수가 탄생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수의 탄생을 인간의 창조활동에 비유하여
남과 여, 부와 모 그리고 자녀의 출산으로 이해할 때
숫자 2는 여성과 어머니에 해당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만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고
새로운 자녀들이 탄생하는 인간의 발전사는
여성과 어머니를 통해 이루어지는 창조의 역사입니다.
한편, 신화적인 의미로 이해할 때
둘이라는 숫자는 신의 대립적 성격을 나타냅니다.
특히, 선신과 악신의 대립에서
둘의 관념은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창세신화나 건국신화에서
둘은 긍정적인 신격과 부정적인 신격이
서로 대결하는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선신과 악신
세상을 만든 신과 이를 빼앗으려는 신,
기존의 왕과 새로이 나라를 세우려는 영웅
이들은 한결같이 둘의 대립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둘은 하나에서 비롯되며,
하나는 서로 다른 하나와 화합이라는
매개의 구실도 합니다.
신화에서 둘이라는 숫자에는
대립과 조화라는 상징성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선과 악의 대립과 화해와 화합으로
세상은 새로운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게 됩니다.
동양에서도 둘은 음의 수이며
변화와 균형, 그리고 이원 우주에서 나타나는
모든 상보적인 대립을 상징합니다.
또한 음은 양과 합쳐져 '태극'을 이루며,
태극은 전체로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동시에,
순수한 본질로 통합을 이루게 됩니다.
음양은 두 가지 힘으로 긴장과 대립 관계에 있으나,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반려의 관계를 유지하므로,
따라서 둘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다른 하나를 받아들여
수용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둘이라는 수가
전통적으로 악을 상징합니다.
둘(이원성)은
하나(통일)에서 출발한 최초의 숫자로,
최초의 선에서의 일탈이라는 의미에서
죄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단일성과 원초적인 신을 뜻하는
하나에 대립하는 악의 숫자인 둘은
신에 대항하는 적이며,
악의 화신인 악마(사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2개로 갈라진 말굽과
두 갈래로 갈라진 뱀의 혀는
사탄의 표지입니다.
둘과 사탄의 이러한 연관성은 수비학자들이
둘이라는 숫자에 악의와 잔인성,
거짓과 해악의 특성을 부여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수비학 이론에 의하면,
대립하는 한 쌍은 쉽게 분열하며,
그것이 조화와 안정을 이루려면
셋이라는 숫자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삼위일체의 셋이라는 수가 창조되기 이전의
둘이라는 수로 분열된 세상입니다.
예를 들면, 낮과 밤, 빛과 어둠, 선과 악,
영혼과 육체, 천사와 악마, 남성과 여성,
유와 무, 생과 사, 행복과 불행, 참과 거짓 등과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분열과 대극이라는
디아드의 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정신의 원리인 분열과 대극의 통합은
종교적인 활동을 통해 일자인 하나로 회귀하든지
변증법적 창조활동을 통해
셋으로 나아갈 때 가능하게 됩니다.
하나와 셋을 매개하고 중재하는 둘은
그 속성상 대립과 분열을 의미하지만,
모든 발전은
대립과 현상의 부정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둘은 창조와 발전의 원동력이며
모든 사상과 운동의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분화와 발전의 역사가 시작되고
계속하여 새로운 창조물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둘은 서로 이끌리는 상호보완성의 숫자로서,
궁극적으로는 융합되는 통일을 나타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때
매 순간 우리의 의식은
양극단의 참과 거짓, 선과 악 사이에서,
빛과 어둠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통합과 분열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2(디아드)"의 비유는
우리에게 새로운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삶에 있어서
분열과 대극을 통합할 수 있는
빛과 참에 대한 선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명백한 삶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분열의 상태에 빠지게 되어
결과적으로 불신과 혼돈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파멸이 될 수도 있는
디아드의 가능성을 가진 우리는
순간순간 창조적인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 참고문헌 >
한국문화상징사전편찬위원회, 한국문화상징사전 2, 동아출판사.pp.169-172.
명백훈(2006), 숫자 2 - 창조의 문, 경향잡지 2월호.
그리이스어로 '디아드(dyad)'라 불리는 숫자 2는
모든 창조 과정의 기초를 이루는 수입니다.
여기에서 창조란
하나로부터 분열을 거치면서
새로운 통합으로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옛날에는 모나드(1)와 디아드(2)를
모든 수들의 부모라 생각했으며
1과 2라는 부모로부터
자녀들의 수가 탄생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수의 탄생을 인간의 창조활동에 비유하여
남과 여, 부와 모 그리고 자녀의 출산으로 이해할 때
숫자 2는 여성과 어머니에 해당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만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고
새로운 자녀들이 탄생하는 인간의 발전사는
여성과 어머니를 통해 이루어지는 창조의 역사입니다.
한편, 신화적인 의미로 이해할 때
둘이라는 숫자는 신의 대립적 성격을 나타냅니다.
특히, 선신과 악신의 대립에서
둘의 관념은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창세신화나 건국신화에서
둘은 긍정적인 신격과 부정적인 신격이
서로 대결하는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선신과 악신
세상을 만든 신과 이를 빼앗으려는 신,
기존의 왕과 새로이 나라를 세우려는 영웅
이들은 한결같이 둘의 대립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둘은 하나에서 비롯되며,
하나는 서로 다른 하나와 화합이라는
매개의 구실도 합니다.
신화에서 둘이라는 숫자에는
대립과 조화라는 상징성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선과 악의 대립과 화해와 화합으로
세상은 새로운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게 됩니다.
동양에서도 둘은 음의 수이며
변화와 균형, 그리고 이원 우주에서 나타나는
모든 상보적인 대립을 상징합니다.
또한 음은 양과 합쳐져 '태극'을 이루며,
태극은 전체로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동시에,
순수한 본질로 통합을 이루게 됩니다.
음양은 두 가지 힘으로 긴장과 대립 관계에 있으나,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반려의 관계를 유지하므로,
따라서 둘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다른 하나를 받아들여
수용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둘이라는 수가
전통적으로 악을 상징합니다.
둘(이원성)은
하나(통일)에서 출발한 최초의 숫자로,
최초의 선에서의 일탈이라는 의미에서
죄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단일성과 원초적인 신을 뜻하는
하나에 대립하는 악의 숫자인 둘은
신에 대항하는 적이며,
악의 화신인 악마(사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2개로 갈라진 말굽과
두 갈래로 갈라진 뱀의 혀는
사탄의 표지입니다.
둘과 사탄의 이러한 연관성은 수비학자들이
둘이라는 숫자에 악의와 잔인성,
거짓과 해악의 특성을 부여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수비학 이론에 의하면,
대립하는 한 쌍은 쉽게 분열하며,
그것이 조화와 안정을 이루려면
셋이라는 숫자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삼위일체의 셋이라는 수가 창조되기 이전의
둘이라는 수로 분열된 세상입니다.
예를 들면, 낮과 밤, 빛과 어둠, 선과 악,
영혼과 육체, 천사와 악마, 남성과 여성,
유와 무, 생과 사, 행복과 불행, 참과 거짓 등과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분열과 대극이라는
디아드의 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정신의 원리인 분열과 대극의 통합은
종교적인 활동을 통해 일자인 하나로 회귀하든지
변증법적 창조활동을 통해
셋으로 나아갈 때 가능하게 됩니다.
하나와 셋을 매개하고 중재하는 둘은
그 속성상 대립과 분열을 의미하지만,
모든 발전은
대립과 현상의 부정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둘은 창조와 발전의 원동력이며
모든 사상과 운동의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분화와 발전의 역사가 시작되고
계속하여 새로운 창조물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둘은 서로 이끌리는 상호보완성의 숫자로서,
궁극적으로는 융합되는 통일을 나타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때
매 순간 우리의 의식은
양극단의 참과 거짓, 선과 악 사이에서,
빛과 어둠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통합과 분열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2(디아드)"의 비유는
우리에게 새로운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삶에 있어서
분열과 대극을 통합할 수 있는
빛과 참에 대한 선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명백한 삶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분열의 상태에 빠지게 되어
결과적으로 불신과 혼돈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파멸이 될 수도 있는
디아드의 가능성을 가진 우리는
순간순간 창조적인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 참고문헌 >
한국문화상징사전편찬위원회, 한국문화상징사전 2, 동아출판사.pp.169-172.
명백훈(2006), 숫자 2 - 창조의 문, 경향잡지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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