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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고의 고통 속에 새로 태어나는 9월
-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품지> 9월호에 실릴 글입니다 -
그리스어로 엔네아드(Ennead)라 불리는 숫자 9는 한자리 수로는 가장 큰 수로 완전, 완성, 중심, 전체성을 상징합니다. 엔네아드는 신성한 트리아드(3)의 원리가 최대한 내포되어 있어 균형, 질서, 최상의 완전 등을 표현하는 거룩한 수이며,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나타내는 심판의 수이자 구원의 수이기도 합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불완전함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어떤 한정된 범위에서는 가장 완전하고 가장 큰 수로 간주되어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마태오 복음(18,12-14)의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과 대비되는 아흔아홉 마리 양에 눈길이 갑니다. 아직은 길을 잃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그래서 아직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돌아보게 됩니다. 목자는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에게로 연민의 눈길이 가면서, 가던 발길을 돌리고, 그리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뒤 쫒아 갑니다. 그리고는 되찾은 기쁨으로 어깨에 메고 돌아옵니다.
또한 루카 복음(17,11-19)의 나병환자 열 사람 중 아홉 사람에게도 마음이 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사람 모두를 치유의 손길로 나병을 고쳐주셨건만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병이 나은 열 사람 가운데 아홉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 없이 곧바로 자신의 옛 관습과 터전 곧, 과거의 속박으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오직 한 사람만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되돌아오는 믿음과 지혜를 가졌습니다. 복음은 회개하고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한 사람을 통해 참다운 회개와 참다운 지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또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예수회 신부인 로너건(1904-1984)은 회심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이는 지성적 회심과 도덕적 회심 그리고 종교적 회심입니다. 지성적 회심은 지성의 급격한 정화로서, 진리 앞에서 실재와 객관성과 인간 지식에 대한 자신의 아집과 편견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하며, 도덕적 회심은 개인의 결정과 선택의 기준이 개인적인 만족에서 도덕적 가치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종교적 회심은 궁극적인 것에 의해 사로잡힘을 의미하며 세속적인 것을 초월한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무조건적이며, 온전한 그리고 영구적인 자기―포기가 가능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종교적 회심을 통해 새로 태어날 때,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 안에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연민과 치유의 손길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은 위로의 샘이자 사랑의 대양이기에, 영혼의 참된 지혜는 하느님 품 안에서 그 분의 진리를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연민과 치유의 손길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회심이란, 하느님 사랑의 자궁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새롭다는 단어는 어머니의 자궁과 연관이 된다고 합니다. ‘Teth’는 자궁, 즉 생명의 맹아가 싹트는 여성의 신체기관을 의미하며, 히브리어 자모체계에서 ‘Teth’는 아홉 번째 문자이고, 그 때문에 숫자로서 9라는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9(엔네아드)의 원리로 배열된 형태들이 탄생 과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근거로는 반쪽 세포인 정자의 꼬리는 아홉 번 꼬인 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궁 속에서 발달하는 아홉 달과 신체의 구멍 아홉 개도 9(엔네아드)의 제한적인 원리로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9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 ‘neun’을 비롯하여 9를 의미하는 단어들이 ‘새롭다(neu)’를 뜻하는 단어와 형태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9를 나타내는 산스크리트어 나바(nava)로부터, 그리고 나중에는 라틴어 노바(nova)로부터 유래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홉은 새로움을 의미하는 동시에 새로움으로 나아가기 위한 고통의 준비단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어 9개월 동안의 수태기간 후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는 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경이로운 기적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자궁 속에서 보내게 되는 9개월 동안 어머니와 태아는 인내의 시간도 함께 보내게 됩니다. 무엇보다 출생 시에 아기가 겪는 고통과 산모가 겪는 해산의 고통은 죽음의 직전까지 가야하는 최고의 고통일 것입니다.
9월을 맞이하면서 저 역시도 지나간 일들을 되돌아보며 하느님 사랑의 자궁 안에서 새로이 태어나고 싶은 소망이 간절합니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세상의 빛을 기다리는 아기처럼, 잃어버린 한 마리 양처럼, 돌아와 감사를 드릴 줄 아는 이방인 나병환자처럼! 주님은 순간순간 제가 겪고 있는 고통들을 다 알고 계시기에, 저 자신보다 더 아파하시면서 연민의 눈길과 치유의 손길로 말씀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 4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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