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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몽골아이사랑 소식지 - 시몬신부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7.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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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0
조회수
1878
내용

☂ 원장 신부님 ~

이곳 다르항에는 한국신부인 나, 인도신부, 베트남 신부(이번에 서품 받은 새신부) 그리고 또 다른 베트남 원장신부 이렇게 네 명의 선교사가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9월 15일. 6년 전 나와 함께 몽골에 파견되었을 때는 젊은 수사였던 베트남 폴 수사가 드디어 서품을 받게 되었다. 얼마나 기나긴 세월인가? 그가 수도원에 들어온 지 11년. 오랜 기간의 식별 끝에 갖게 된 서품식이었다.

울란바타르 시에서 230킬로미터 떨어진 시골 다르항에 살고 있는 우리는 몽골신자들과 수녀님 그리고 아이들 50여명이 봉고차 3대와 승용차로 나누어 타고 울란바타르시 주교좌 성당에서 거행하는 서품미사와 첫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부터 나섰다. 음식을 담당한 나는 차안에서 먹을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일찍 일어나 부산을 떨었다.

15일 서품식을 무사히 마치고 주일인 16일에 주교좌 성당에서 첫 미사를 하였다. 미사 전, 존티 원장 신부님이 전례의 부족한 부분을 챙기고 미사 중에 부를 성가를 확인하고 독서자들을 정하며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는 모습이 보였다. 미사 중에도 매끄러운 전례를 신자들 모르게 일을 처리하는 것은 늘 그의 몫이다. 첫 미사를 마치고 원장이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오후 3시에는 다르항에서 데려온 아이들과 울란바트르 한국인 축구 동우회가 축구시합을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고 나는 그전에 시장을 다녀와야 했다. 17일 다르항에서 새신부의 첫 미사가 있을 예정이었고 미사 후에 벌어질 축하식에 필요한 120명분의 음식재료를 사가지고 가야했기 때문이다. 내가 타고 온 차를 다르항으로 먼저 가는 사람들에게 반납해 주어야했기 때문에 마음이 더 바빴다.

시장을 가기위해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나는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하시는 신부님께 잠시 말씀을 드렸다. 신부님은 돈을 가져오기 위해 임시숙소 4층 건물로 올라가셨다. 올 2월 서울에서 심장치료를 받은 적이 있을 만큼 심장이 약하다는 것을 알기에 따라 올라가려고 했지만 마침 옆에 있는 한국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터라 올라갈 수 없었고 그사이 신부님은 돈을 가지고 내려오셨다. 그런데 건네준 금액이 턱없이 부족했고 신부님은 다시 올라가 돈을 가져오셔야 했다. 이번에는 함께 따라 올라갔다.

4층 마지막 계단에서 신부님은 주저앉으셨다. 바로 곁에 있던 두 아이가 신부님을 붙잡았다. 얼굴이 창백해 지셨다. 우리는 신부님을 부축에 소파에 앉혀드렸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돌발적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건너편에 있는 다른 베트남 신부들을 불렀다. 어지럼증이라고 여겼고 조금 안정을 취하면 다시 돌아 올 것이라 여겼다. 소파에 앉아서 기력을 회복하신 신부님은 나에게 돈을 건네주셨다. 가지고 계신 작은 파일속에 이미 돈을 가지고 계셨는데 왜 다시 계단을 올라 가셨는지?

나는 돈을 받고 그 자리를 떠나 시장으로 향했다. 차를 돌려줄 시간이 2시간밖에 남지 않았기에 나는 그 시간에 얼른 장을 보아야한다는 부담감이 가득했다.

시장으로 가는 사이에 원장 신부님 곁에 있는 수녀로 부터의 전화. 신부님이 소변이 마렵다 해서 화장실에 가셨는데 그곳에서 대자로 다시 쓰려지셨다는 전달을 받았다. 몽골에서 봉사하셨던 송베드로 의사 선생님, 몽골에 다녀갔던 간호 수녀님에게 급히 전화를 해서 어떻게 처치를 해야 할지 물어 보았다. 몽골 병원이 미덥지는 않지만 병원으로 수송하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날이 주일이었기 때문에 응급실 병원을 찾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그 사이 응급처치로 아이들과 함께 사시는 봉사자 자매님이 수녀님이 사용하는 머리핀으로 신부님의 손가락을 따고, 몽골 여의사가 와서 응급실로 실어 가는 도중에 마른 입안에 알약을 넣는 등 신부님에게 여러 가지 응급처치를 하였다. 학교에서 가까운 제2병원 응급실로 가면서 신부님은 계속 가라앉는 것 같았고 세 번째 눈을 떴을 때 “사랑하는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말하고 그 뒤에는 의식을 잃으셨다고 했다.

나는 예정된 축구시합 경기에 가야만 했고 아이들과 함께 경기장에 있을 때 앤드류수사에게 전화가 왔다. 존티 원장 신부님이 위험하니 어서와보라고 했다. 나는 급히 달려갔다. 신부들과 수녀들이 응급실 바깥에서 가슴 조마조마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아무것도 없었지만 상황을 지켜보며 그들과 함께 자리를 지켰다.

내가 달려오는 사이에 .... 의식을 잃고 있는 신부님께 의사들은 혈압을 재고 산소호흡을 시켰다. 혈압이 나오지 않아 여러 주사를 찔러 넣고 급기야 전기 쇼크를 심장에 가하게 되었다. 다행히 심장은 다시 소생하게 되었고 낮은 수치이지만 혈압이 올라가게 되었다.

내가 병원에 들어섰을 때는 신부님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해 한사람씩 면회가 허락될 때였다. 몇몇 사람만 응급실에 들어가 심장박동의 상태를 보고 나와서 밖에 있는 신부수녀들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책임자인 가를로 신부는 혹시나 병세가 더 악화되는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한국으로 급히 실어 나르기 위해 6천만 원이나 하는 전세비행기를 계약하려고 애쓰고 있었고 긴장된 모습이 역력하였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곳에서 빠져 나와 다시 축구장으로 돌아갔다. 어둑어둑해져 가는 운동장은 거의 경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경기가 끝난 아이들을 먼저 다르항으로 보냈고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 나는 남아 있기로 하였다.

신부님 생명의 위험수위가 지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신부들은 병원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나도 울란바타르에 남아 있기로 한 결심을 바꾸어 그날 밤 늦게 다르항으로 돌아왔다.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나 자신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와 함께 계단을 올라가던 분이 갑자기 주저앉았다. 그의 고통 앞에서 정말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고통당하고 있는 인간 앞에서 나의 목적을 위해 시장에 가버렸다. 첫 미사 축하식을 위해 지금 시장을 보지 않는다면 일이 엉망으로 될 것이 눈앞에 그림처럼 나타났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신부들이 옆에 있으니 괜찮겠지.... 그러나 고통당하는 인간 앞에서 내가 함께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없지는 않다.
내 자신 쓰러진 원장과 깊은 사랑의 관계는 아니다. 나눔을(에) 통해 느껴지는 애틋한 우정이 축적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와 생활한지 이제 겨우 1년 남짓 되었다.

원장신부님과는 생각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서로 살아온 관습도 다르고 10년 윗선배로 세대도 다르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원장이고 돈보스꼬 정신으로 살아가는 살레시안이라는 이유로 함께 공동생활을 할 뿐이다. 아이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다보니 정작 우리끼리는 서로 간에 인간적인 교감을 느끼며 살 여유도 없을뿐더러 원장은 나의 심정을 상하게 한 적이 있다.

몽골 선교지에 이제 막 도착 한 그는 선교지에 적응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동안 암갈랑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모든 것을 새로 셋팅하려고 했다. 길거리 아이들을 위해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하고 있는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조금 시간을 두고 관찰하고 바라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는 내가 하고 있던 일들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그의 구상대로 새롭게 다 바꾸어버린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지금의 것을 일구어낸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고 유교적인 사고에 익숙한 내가 달려들어 따져볼 수도 없었다. 나의 왜소함이 느껴졌다. 마치도 어린 시절 10년 위인 친형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런 원장과 살면서 풋풋한 인간애를 느끼기 어려웠다. 내가 아이들과 함께 할 때와는 달리 유머 있는 말로 웃음을 줄 수 있는 충분한 언어력을 갖춘 것도 아니다. 공동체에서 겨우 신부들을 위해 매일 저녁준비 하는 일을 충실히 하는 정도의 관계만을 유지하며 지내왔다.

그가 고국에서 훌륭하게 베트남 살레시오를 이끌어 왔다는 것을 안다. 지난 날 그가 베트남의 정치 격변기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겪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통해서 나 자신을 반성해 본다.

강하다고 여겼던 신부님이 하루아침에 쓰려졌다. 그의 약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동안 나는 원장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적 관계를 맺기보다는 수도생활의 규칙을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관계를 맺는 것에 만족하려 했다. 네 명의 신부가 함께 사는 데 설거지 한번 식사준비 한번 도와주지 않는다는 이유로...식탁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혼자서만 이야기 하는 모습에서... 계획을 세울 때 다른 이들의 생각이나 경험은 고려하지 않고 혼자만의 생각을 고집하는 모습이 너무 강하게 느껴져서....충분한 토론에 의한 계획 수립이 아니라 낙하산식으로 내려오는 계획에서...사람의 마음을 사면서 일을 하기보다는 체계적인 조직을 통해서 일을 하려는 모습에서...나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머리는 사용하지만 마음은 이해해 주지 못한다는 생각에서....몽골어를 잘 모르는 그가 머리로 세운 계획들이 실제로 몽골인 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능력은 잘 조직되어 있는 관구에서는 적용되겠지만 몸으로 뛰어야하는 선교지에서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일을 할 때도 모험을 감수하더라도 일단은 시작하고 차차 되어지는 대로 일을 하는 나와는 달리, 할 수 있는 일만을 하려고하는 모습, 머리속에서 확연히 드러난 계획만 하려고하는 모습이 스케일이 작고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그는 격변기에 홍콩관구의 선교사 신부님에 의해 양성되었고 30살에 이미 그는 관구장이 되었다. 두 번의 관구장을 지냈고 수련장을 지냈으며 5개 국어를(영어, 이태리어,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구사하는 능력을 가진 분이시다. 그가 어릴 때 부모님이 베트남 독립을 위해 일하다가 프랑스 군인에 의해 살해 되었다는 이야기,,.어릴 때부터 살레시오 집에서 살았다는 이야기... 사목을 할 때 오토바이를 타고 강의를 위해 400킬로를 달려갔는데 기적같이 달리는 중에는 괜찮다가 다음날 도착하고 나서야 오토바이가 폭삭 주저앉은 사건,.. 신학생 때 이태리에서 귓병 때문에 하마터면 죽을 뻔한 이야기... 그래서 그의 오른쪽 귀는 찌그려져있다. 공산당원들의 눈을 피해서 성소자를 키워 내기 위해 색다른 프로그램으로 청소년 사목을 하던 이야기...거주이동의 자유가 없는 베트남에서 함부로 다른 집에서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들... 나와 다를 뿐 그는 능력 있고 신심 깊은 살레시안인 것이다.

강하게만 느껴졌던 원장신부님이 쓰러져 약한 모습을 보이셨다. 그의 약함 앞에서 나도 약해졌다. 그의 강함 앞에 맞섰던 나의 모든 방어벽이 무너졌다. 나는 그동안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거리감을 두고 판단하고 마음으로 가까이 하지 않은 나의 부족한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우리는 약함 앞에 약해진다. 가장 나다운 모습이 드러난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한 모습으로 다가 오셨나보다. 인간을 잘 알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의 약함 앞에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의 약함 앞에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된다. 우리 모두는 사랑받고 사랑하기를 원하며 사랑으로 하나 될 때 가장 행복한 존재이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그도 사랑받기를 원하는 한 존재이다. 나처럼.... 앞으로 좀 더 인간적으로 그에게 다가갈 것을 결심해본다.

여하간 그는 위험 수위를 지내고 일반 비행기로 네 개의 좌석을 빌려 의사와 함께 강남 성모병원으로 실려 갔다. 어쩌면 그는 다시 몽골로 돌아오지 못할 지도 모른다.....

2007년 9월 30 다르항에서
이호열 시몬신부☃


/생활 묵상/

< 의사의 소명( 히포크라테스 정신) >

다르항에서 봉사자로 2년간 사셨던 송 봉규 의사선생님이 추석연휴 동안 잠시 다르항에 오셨다. 바로 환자를 위해서이다. 장기적으로 약을 먹어야 하는 고혈압 환자들 그리고 평생 동안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하는 만성병 환자들을 위해서 한 해 동안 먹어야 할 약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누가 오라고 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셔서 고통당하는 환자들에게 약을 나누어 주었다. 그분의 일화는 유명하다. 강원도에 살고 계실 때 친구들과 술 먹으며 농담으로 황영조가 마라톤 대회에서 일등하면 “내가 훌렁 벗고 신작로를 뛰겠다.”라고 말했다. 우승을 하면 내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약속과도 같은 것이었다.

황영조가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일등 했을 때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그는 정말로 옷을 훌렁 벗고 스트리킹을 하신분이시다. 언행이 일치하는 그런 분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이 행복하고 그리고 부끄러운 한 신부이다....


< 금붕어 >

아이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던 암갈랑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 이곳 다르항에는 있다. 바로 수족관이다. 가로세로 70× 20센티 높이 50센티 되는 수족관. 그것을 보면서 내가 그동안 살았던 삶과 사뭇 다른 삶을 살았던 신부들의 모습을 보았다. 수족관의 금붕어를 보며 생각해 본다.

금붕어는 항상 눈을 뜨고 산다는 것. 잘 때도 먹을 때도 죽을 때도 눈을 감은 적이 없다는 것. 가만히 보니 금붕어에게는 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금붕어는 듣는 것보다도 보는 것을 선택한 것 같다. 불가(佛家)에 가보면 지붕 처마에 딸랑 거리는 풍경이 물고기 모양으로 되어 있다. 무슨 이유일까? 나름대로 생각해 보면 “항상 깨어 있으라.”것.

바다에 수많은 물고기가 살아도 수족관에서 물고기가 하루 종일 헤엄을 쳐도 그 때문에 파도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작은 존재...그리고 바다는 모든 생명의 근원지이다.


< 울타리 >

유목인은 짐승을 가두지 않고 오히려 움직이지 않는 채소밭에 울타리를 친다. 경작인은 경작지를 보호하기위해 움직이는 소를 가두어 둔다. 유목민이 짐승을 가둘 때는 젓을 짜거나 털을 깎을 때 혹은 말을 길들이기 위해서 이다. 그러니까 일시적으로는 가두어두지만 그 이후에는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이다. 교육은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 잠시 울타리 안에 가두어두는 것과 같다. 교육의 진정한 목적은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것. 자유롭게 넓은 목초지를 누비는 말처럼 달리는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것이다.


 새로운 소임지 다르항 주소

Fr. Lee Ho Yeol Si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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