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료실
4. 정신분석 패러다임 : 대상관계이론
자아심리학이 이드심리학에 근거한 정신분석 상황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지만, 정신분석치료 과정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 온 것은 대상관계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심리학적 정신분석에서 분석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해석(Interpretation)과 이를 통한 환자의 통찰(insight)이었다. 그러나 대상관계이론은 치료 요인에 대해 자아심리학과는 다르게 생각한다. 대표적인 대상관계이론가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우선 Fairbairn(1941)은 치료자의 해석과 환자의 통찰만으로는 분석적 변화를 충분히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사람은 무의식적인 욕동에 따라 대상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 내면화된 초기 대상관계에 따라 인간관계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또한 정신병리란 현실세계의 타인들과 관계에서 과거의 고통스러운 관계 유형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해석과 통찰만으로 치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 대상관계를 포기하고 새로운 대상관계를 경험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치료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Fairbairn이 말하는 분석적 변화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어린 시절 경험하는 대상들 중에는 고통을 안겨 주는 대상들이 있다. 만일 부모가 아이를 거부하고 괴롭힐 때, 아이는 대상을 통제하기 위해 부모를 내면화한다.
그러나 내면화된 대상들은 내면의 세계에서 여전히 힘을 유지하게 된다. 그래서 “내부 파괴자”로 남아 불안을 일으키고 고통을 준다. 결국 내면화된 대상들은 외부에 있을 때만큼이나 고통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내면화될 뿐 아니라 또한 억압된다.
이 때 일차적으로 억압된 것은 견딜 수 없는 충동이나 불쾌한 기억이 아니라 내면화된, 견딜 수없이 나쁜 대상들이다. 안타깝게도 내면화된 나쁜 대상을 억압 한다고 하여 그들이 내면 심리세계에서 제거되지는 않는다.
결국 억압으로 제거되지 못한 대상들은 다시 외부 현실세계로 투사(projection)된다. 그 결과 처음엔 외부 대상이 내면화되어 형성되었던 내적 심리세계가 이번엔 반대로 외부 현실세계에서 다시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실 속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게 혹독했던 과거 아버지의 상을 투사하게 되면, 직장 상사가 눈에 띄면 무조건 자리를 피하거나, 업무 보고를 할 때 부르르 떨 정도로 두려워하거나, 극단적으로는 그만두는 등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관계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내면화된 초기 대상관계를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게 되는 환자는 치료자와 관계에서도 병적인 대상관계를 반복하려 한다. 이러한 대상관계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처럼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와의 관계에서 병적인 대상관계를 형성했던 사람이 그런 병적 관계를 포기한다고 저절로 건강한 대상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대상관계는 새로운 관계 속에서 다시 만들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대상관계이론에서 전이 해석의 초점은 억압된 욕동이 아니라, 나쁜 대상관계의 반복이다. 즉 환자로 하여금 불안과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충동이 아니라, 내면화된 나쁜 대상들인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해석과 통찰만으로는 분석적 변화-좋은 대상관계-가 저절로 형성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 대상과 맺었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관계를 지금 치료자와 시작함으로써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관계경험이 필요하다.
자신이 이해받고 또 새롭게 교류할 수 있다는, 예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관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해야만, 내면화된 옛 대상들과의 강렬한 중독적인 관계양식을 포기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치료자와 새로운 관계체험을 이루어나갈 수 있게 된다.
다음으로 Winnicott(1965)은 분석상황이 개인적인 주체성을 새롭게 탐색하고 재생시킬 수 있는 완벽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분석가는 충분히 좋은 어머니(good enough mother)로서 환자가 느끼는 깊은 내면의 욕망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Winnicott에 의하면, 환자의 정신 병리는 특정한 욕동이나 갈등이 아니라 관계를 경험하는 전체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어, 자신의 자발적인 욕구를 무시하고 지나치게 요구하고 침범하는 어머니에게 맞춰 성장할 수밖에 없는 아이 자신의 관계방식(거짓 자기, false self)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자는 분석 상황 안에 “존재하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며, 그 외에 아무 것도 요구받지 않는다. 환자는 분석 상황에서 자신이 경험하는 것을 느끼고 표현하기만 하면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환자는 단절되었던 참 자기(true self)가 다시 발달할 수 있는 안아주는 환경(holding environment)을 새롭게 경험하게 된다.
Winnicott은 환자가 단순히 전이-역전이에 관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분석상황에 참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환자가 강력한 자기회복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환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상실되었던 환경적 특성을 분석상황에서 만들어내고 형성하려 한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Winnicott은 분석의 내용이나 해석에 대해서는 거의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분석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환자가 분석가와의 관계에서 갖게 되는 ‘자기의 경험’(experience of self)이었다.
또 다른 Klein 학파인 Joseph(1989)도 환자는 자신의 내적 대상관계(internal object relations) 전체를 분석상황에서 실현시키려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내적 대상관계 전체가 실현되는 ‘지금 이 순간’(here and now)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비록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였지만, 대상관계이론의 창시자로 정신분석상황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은 Klein이다. (그녀의 이론은 <현대정신분석이론> 각장을 마련하여 후에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Klein(1946)은 Freud의 투사(projection)이론을 확대하여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이론을 고안하였다. 투사적 동일시가 가장 흔하게 일어나는 관계는 대상을 자신의 일부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강력한 욕구를 가진 부모-자녀관계, 사랑과 우정의 관계이다.
투사는 단순히 욕동을 투사하게 되지만, 투사적 동일시에서는 욕동과 함께 <자신의 일부>를 투사하게 된다. 그러므로 투사한 사람은 <자신의 한 측면>을 보유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계속 연결성을 유지하려 하고(keep connection), 그를 조정하려 한다(controlling).
이는 분석상황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그 결과 치료자는 마치 환자가 투사한 내용을 가진 사람처럼 반응하게 된다(projective counter-identification). 이러한 치료자의 반응을 경험하면서 환자는 자신이 투사한 내용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치료자의 것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Klein의 투사적 동일시 개념의 가장 큰 의미는, 환자가 분석가를 끊임없이 끌어들이려고 하는 강력한 무의식적 욕구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 점이다. 그러나 Klein의 투사적 동일시 개념의 한계는 환자의 심리 속에서 일어나는 환상으로 아직은 정신적 사건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Bion(1957)은 환자를 치료하면서 환자가 투사하고 있는 강렬한 감정과 경험들을 자기 자신이 직접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즉 환자의 환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치료자가 실제로 경험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통하여 Bion은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가 한 사람의 마음 속(intrapsychic)의 환상이 아니라, 두 사람의 심리 사이(interpersonal)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관계적 상호작용이라고 그 개념을 확장시켰다.
또한 Spillius(1983)는 치료자가 상호작용으로서 투사적 동일시를 이해하는 것이 치료 현장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만약 치료자가, 경직된 공식화된 언어적 해석만 한다면, 이는 투사적 동일시라는 생생한 교감의 순간을 인식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분석가에게 진정 필요한 자세는,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가 일어나고 있는 생생한 현장에서, 환자의 투사(projection)를 인식하고, 그것을 담아낼 수 있는(contain) 능력이며, 나아가 이를 적절하게 되돌려 주는 능력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자기심리학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출처 : 최영민(2008). 상호주관성 –정신분석 패러다임의 변화- . 논문 요약
< 참고문헌 >
최영민(2010). 대상관계이론 중심으로 쉽게 쓴 정신분석이론. 학지사.
Lavina Gomez(2008). 김창대 외 공역(2010). 대상관계이론입문. 학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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