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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숨을 담는 숨통이 되어
-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품지>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복음 말씀 중 "말씀의 숨"(마르코 4,19)을 기억합니다. 제 안에 말씀이 살아 움직이고 숨 쉴 수 있도록, 성령의 숨결이 자유롭게 흐를 수 있도록, 맑고 투명한 울림통, 하느님 사랑의 숨통이 되기를 희망하며 이 글을 시작합니다.
돌아보면 약 25년 동안 어림잡아 10,000회기 정도의 상담을 하면서 수많은 내담자를 만났지만 인격이 부족한 탓에 상담이 실패하는 경험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년이면 60이 되니 그동안의 실수들을 경험삼아 특정한 학파나 이론에 치우치지 말고, 스승이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진정한 가톨릭 상담자로 거듭 나야할 시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2014년은 저에게 특별한 해였습니다. 그동안은 주로 개인 상담실에 앉아서 편하게 내담자를 만나곤 했습니다. 저를 찾아오는 대부분의 내담자들은 유료상담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경우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는 앉아서 맞이하는 상담이 아니라 내담자들을 직접 찾아가는 상담자로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덜컹거리는 노마(老馬)를 타고 통일전망대가 바라다 보이는 대진, 거진, 속초, 양양, 강릉, 동해에서 평창, 영월, 춘천 그리고 탄광지역의 자취가 남아있는 삼척 도계, 태백까지 대관령, 미시령, 한계령, 진부령, 삽당령 등 강원도 산골짜기의 고개를 넘고 동해안의 해안가를 따라 마음이 부서지고 영혼이 상처받은 아동, 청소년들을 만나고 다녔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연보다 더욱 아름다운 영혼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각급 학교에서 실시하는 정서행동특성검사 결과 자살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어 상담 및 심리치료가 필요한 아이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은 부모가 이혼한 편부모 가정이나 조손가정에서 기초수급자로 생활하고 있었기에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서적으로도 심한 애정 결핍상태에서 힘들게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가도 반겨줄 사람이 없는 아이들이 대부분으로 밤늦게까지 거리에서 방황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모성의 부재가 가져오는 상실과 슬픔 그리고 상처 입은 부모로부터 학습된 분노가 켜켜이 쌓여 조금만 건드려도 울분이 터져 나올 것 같고, 마음이 푸석거리다 못해 삶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모성이 사라진 싸늘한 집에 들어가면 마음의 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도 없이, 사랑의 불씨가 사라져 냉기가 도는 차가운 마음 바닥에서 아이들은 추위에 웅크리며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러한 아이들을 반겨주고 불씨를 당겨 마음 바닥을 데우고 온기로 녹여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모성적인 젖줄을 통하여 사랑을 나누어주고 있는 위센터, 위클래스 상담사들입니다.
가정이 해체되어가는 과정에서 어릴 적부터 부모로부터 상처받으면서 마음이 아프고 지치고 힘든 아이들이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따스한 품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녀들을 통해 사회적 모성성을 보게 되며 공동체적인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얼마 전 바로 그러한 사회적 모성성을 발휘하는 전문상담사들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집단상담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대부분의 만남이 감동적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지난 2월 초에 모 교육청 전문상담사들을 위한 <정신역동적 꿈투사 집단상담>은 특별한 만남이었습니다.
2박3일 동안 전문상담사들과 울고 웃으면서 함께 했던 시간들이 너무 소중했으며, 힘든 아이들을 자식처럼 돌보면서 사랑을 나누어주고 있는 그들에게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녀들을 통해 위로받고 사랑받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연민과 치유를 체험하였습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삶의 위기에 처해 있는 여성들과 아동, 청소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들과 연대하면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여성들도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전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가장 커다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 자신의 육화는 바로 여성 안에서 여성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여성의 존엄성은 여성 특유의 본성을 통하여 부여받은 하느님의 은혜로운 사랑과 밀접하게 연결되며, 동시에 그것은 이웃을 통하여 되돌려 드려야 할 연민어린 사랑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면서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는 바로 그 순간, 인간은 자신을 온전하게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제게도 새로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상처 입은 아동, 청소년들을 만나는 일이 이제는 너무나도 소중한 소명이자 과업이 되었습니다.
각 지역의 학교 위클래스와 교육지원청의 위센터에서 심리치료자로 초대를 받으면, 이전과는 다르게 거절하지 않고 “네!” 하면서 달려갑니다. 마치 그리스도의 제자로 파견된다는 소명을 가지고 기쁘게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말씀의 숨을 담은 숨통이 되어 열심히 달려갈 것입니다.
김병주
심리치료전문가. 심리상담전문가. 가톨릭상담심리전문가. 수필가.
성균관대학교 교육학과, 서울대학교 교육학석사, 성균관대학교 교육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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