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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으로 살아내어 다시 살아나기
-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품지>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상담자로서 여성 내담자들을 만나면서 느끼는 것은, 여성으로 태어나 여성으로서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기가 무척 힘들다는 것입니다. 여성이 어떠한 환경에서 출생, 성장하며 생활해 왔는지는 각자의 삶의 역사에 따라 다르지만, 여성으로 살아내기 위해 애를 쓴 마음들 안에는 기쁨과 슬픔, 고통과 좌절, 인내와 희망 등 수많은 경험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또한 남성들과는 달리 고유한 발달경로를 거치기에 여성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체험들이 있습니다.
여성의 전 생애를 발달론적으로 보면, 여성은 출생 후 여아에서 소녀, 처녀, 아내, 어머니, 할머니의 단계를 거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각 단계는 단계마다 주어진 삶의 과제들과 위기들이 있으며, 그러한 과제들을 해결하지 못할 때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물론 현대사회는 독신을 지향하면서 아내나 어머니의 단계를 포기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처녀가 미혼모가 되는 사례들도 늘어나고 있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보편적인 발달단계에 따라 출생, 성장, 발달, 노화해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여성의 전 생애발달을 성정체성의 형성과정으로 이해해 볼 때, 초경 이전의 여아와 소녀의 단계는 여성성이 분화되기 전의 미분화된 양성성의 단계라 할 수 있고, 청소녀와 처녀의 단계는 여성성이 분화, 발전되는 시기이며, 아내와 어머니의 단계는 여성성이 발현되는 동시에 모성성이 분화, 발전되는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폐경 이후의 할머니 단계는 이미 분화된 여성성과 모성성을 바탕으로 남성성과 부성성을 통합해가는 진정한 의미의 양성성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단계는 보편적인 모성성으로 발전해나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초경에서 폐경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의 참자기를 억압한 채, 사회나 가족이 요구하는 고유한 성역할을 수행하면서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내게 됩니다, 이 단계의 여성들은 우정과 사랑, 학업과 직업생활, 결혼과 임신 그리고 출산과 육아, 자녀교육과 신앙생활 등에 헌신하고 애쓰다가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극도로 쇠약해지고 피폐해지면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낄 즈음에 상담실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중년기 여성들이 상담을 의뢰하는 주요 문제들로는 경제적인 위기, 그동안 묻어두었던 부부갈등, 원 가족과의 미해결된 과제, 고부갈등, 양가 부모님들의 노화와 질병에 따른 돌봄의 문제. 부모님들과의 사별, 사춘기 자녀들의 성장에 따른 스트레스, 자녀들의 분가와 결혼, 그리고 손자녀의 출생 후 대리 양육의 문제 등. 겉으로 보기에는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키면서 복잡해보이지만, 결국에는 관계의 문제 특히 자기 자신과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여성들에게 있어서 어머니에서 할머니로 이행하는 단계는 가장 길고도 버거우며 혼란스러운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생의 중년기까지 각자가 혼신을 다해 노력해 왔던 것들의 의미를 흔들어서 재점검해보고,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외면해왔던 본래의 자기 자신을 만나는 길이자,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향해 홀로 떠나는 여행이기에, 낯설음과 두려움, 불안과 우울, 그리고 분노 등의 감정들이 뒤섞이면서 자신과의 참 만남을 방해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내면으로의 여행은 여성으로 살아낸 역사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몸과 마음의 고통을 수반하지만, 이 여행을 통해 무의식에 묻혀져 있는 지혜의 보물창고를 발견하게 되면서, 죽음의 터널을 지나 긴 여행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년기의 위기를 통하여 내면의 여행을 거치면서 다시 되살아난 여성들은 개인적인 탐욕과 집착, 원망이나 미련 등의 감정으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지면서 보편적인 사랑과 나눔이 가능하게 됩니다.
여성으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아낸 할머니들에게는 사랑과 창조와 배려가 이성과 경험으로 결합된 지혜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지혜로운 할머니가 되기보다는 이전 단계로 퇴행하는 여성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미성숙하고 자기애적인 여성들,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여성들, 억압이나 착취를 당하고 있는 여성들, 사회적 지원 체제가 부족하여 무기력하고 지쳐있는 여성들. 이들의 경우에는 내면으로의 여행을 감행할 여력이 없기에 통과의례 자체를 미루거나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 결과 좌절과 무력감에 빠지기도 하고, 불행하고 우울했던 과거의 시기로 퇴행하면서 우울증으로 고생하기도 하며, 때로는 중년기의 일탈을 감행하기도 하고, 신체적 정신적인 질병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성으로 살아내기가 고통스러운 여성들에게도 자신의 주어진 환경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방법은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고통의 순간들이 지혜의 문으로 초대하는 통과의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태어나기 전 최초로 만난 여성인 어머니와 할머니의 삶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살면서 만나온 소중한 여성들과의 경험을 통하여 여성으로서의 삶을 재조명해 보고, 여성으로서 살아낸 삶의 의미를 되찾음으로써, 각자가 처해 있는 삶의 현실에 따라, 그리고 각자의 창조적인 선택에 따라, 진정한 여성으로 다시 살아나는 작업을 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내면의 삶을 인도해가는 영혼의 안내자, 지혜로운 할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발달과정을 겪으시고 하느님의 어머니이시자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의 삶을 늘 묵상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특히 고통 중에서, 우리 안에, 우리 곁에, 교회 공동체에, 그리고 천상 예루살렘에서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위로해주신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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