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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 9월의 상징적 의미 > - 김병주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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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4232
내용


< 9월의 상징적 의미 >


그리스어로 엔네아드(Ennead)라 불리는 9는 한자리 수로는 가장 큰 수로 완전, 완성, 중심, 전체성을 상징합니다. 즉, 9는 신성한 트리아드(3)의 원리가 최대한 내포되어 있어 균형, 질서, 최상의 완전 등을 표현하는 거룩한 수이며, 속세(俗世)와 초월적인 무한(無限) 사이의 경계를 나타내는 심판의 수이자 구원의 수이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9를 '지평선'이라 불렀습니다. 9는 처음 아홉 개의 수들이 끝없는 순환을 통해 반복되면서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극한의 경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피타고라스 학파에서도 일곱 개의 수(3에서 9까지)중에서 마지막 수인 9는 수의 생성 원리가 미칠 수 있는 한계라고 보았습니다.


고대의 수학적 철학자들은 9를 '종착역'또는 '완성에 이르는 곳'이라 불렀는데, 9는 모나드의 한 형태이자 수 자체의 영역을 넘어서는 데카드(Decad)에 이르기 전에 존재하는 마지막 단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도 숫자 9는 완벽을 상징하는 3이 제곱된 가장 길(吉)한 숫자로 하늘의 힘을 나타내는 천상계의 숫자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즉, 아홉은 8방위와 중앙의 아홉 번째 지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중심을 상징하는 명당의 수이기도 하여 제사나 제례를 올리는 장소로서 신성시 되었습니다.


동양의 음양사상(陰陽思想)에서 9는, 10의 단위 내에서 최대의 양수(陽數)입니다. 음양사상에서 기수는 하늘, 위(上), 해, 남성 등과 같이 강하고 능동적이고 포괄적인 것을 의미하는 상서로운 숫자입니다. 기수 중에서도 3이 가장 완전수의 최소 단위이며, 9는 이 3이 제곱된 형태로서 양의 기운이 충만한 숫자라고 합니다.


유교에서는 전통적으로 구경(九經)이라 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을 학문의 기본 도서로 삼았으며, 또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법으로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들었습니다.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덕으로 구덕(九德)을 말하고, 군자가 항상 명심해야 할 아홉 가지 생각으로 구사(九思)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른 몸가짐으로 구용(九容)을 덧붙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구천(九天)은 하늘을 아홉 방위로 나눈 것으로, 지구를 중심으로 9개의 천체가 돌고 있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또한 구품연대(九品蓮臺)는 극락의 연대를 9등급으로 나눈 것으로 구품정토(九品淨土)라고도 합니다. 나아가 구품행업(九品行業)을 구계(九界)라고도 하는데, 십계(十界)에서 불계(佛界)를 뺀 지옥,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의 아홉 세계를 가리킵니다.


무속(巫俗)에서도 아홉은 완전수를 상징합니다. 제주도에서는 음력 9월 9일을 무조(巫組) 명도(明圖)의 생일이라 하여 심방(무당)들이 마당에 기를 세우고 큰 굿을 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명도(明圖)는 무당이 수호신으로 위하는 청동으로 된 크고 둥근 거울을 가리키는데 이 날이 명도의 생일인 것은 9가 겹친 날이어서 양(陽)의 기운이 넘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국 무속 신화인 바리공주에서도 아홉은 완전수 또는 완성수를 상징합니다. 바리공주는 부모에게 버림받았으나 죽어 가는 부모를 살리기 위해 생명수를 얻으러 가다 무장승에게 잡히게 됩니다. 이에 바리공주는 물 긷기 3년, 불 때기 3년, 나무하기 3년씩 석삼년 아홉 해 동안 일해 준 후 생명수를 얻게 되며 비로소 완전한 신격(神格)을 얻게 됩니다.


많은 언어에서 '새롭다'는 단어는 9를 나타내는 산스크리트어 나바(nava)로부터, 그리고 나중에는 라틴어 노바(nova)로부터 유래했다고 합니다. 9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 ‘neun’을 비롯하여 9를 의미하는 단어들이 ‘새롭다(neu)’를 뜻하는 단어와 형태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9를 나타내는 이집트 상형 문자는 일출과 신원을 나타내는 글자의 일부라고 합니다.


이처럼 '9'와 '새로운 것'이 서로 관련이 되는 것은 바로 9와 함께 하나의 새로운 영역이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어 자모체계에서 ‘Teth’는 아홉 번 째 문자이고, 그 때문에 숫자로서 9라는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고 합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Teth’는 자궁, 즉 생명의 맹아가 싹트는 여성의 신체기관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새로운 생명이 9개월 동안의 수태기간 후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는 것도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엔네아드의 원리로 배열된 형태들이 탄생 과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근거로 반쪽 세포인 정자의 꼬리는 아홉 번 꼬인 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궁 속에서 발달하는 아홉 달과 신체의 구멍 아홉 개도 9(엔네아드)의 제한적인 원리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한편, 9는 ‘10을 기다리는 숫자’라는 측면에서 완전(十:열 십)으로 나아가기 위한 고통스러운 수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아홉은 일종의 준비단계를 의미하기에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노베네Novene’는 가톨릭 신자들이 바치는 9일기도를 의미하는데, 이 기도를 드릴 때 사람들은 특정한 소망을 기원합니다.


9일 기도의 기원은 예수의 승천 이후에 제자들이 올리던 기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도행전(1,13.14; 2,1-4.15)을 보면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제자들이 올린 기도로 그들은 10번째 날인 성령강림까지 9일간에 걸쳐 꼼짝 않고 그 방에 머물면서 기도를 올렸으며, 성령강림 날 아침 9시에 성령께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어떤 말이나 기도나 노래를 꼭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세 차례 반복하는 관행이 전 세계에서 발견되는데, 세 개로 이루어진 어떤 것을 세 차례 반복하여 모두 아홉 번 반복하는 것은 궁극적인 기원을 표현합니다.


99도 9와 마찬가지로 엔네아드의 수평선을 표현하는데 사용됩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이 99세가 되어 우상을 숭배하던 이전의 삶을 마쳤을 때에야 비로소 그에게 나타나 계약을 맺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 이가 되어라.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계약을 세우고,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창세 17,1-2)


또한 우리가 기도 끝에 하는 ‘아멘(amen)’은 ‘그렇게 되게 해주십시오.’라는 뜻의 히브리어에서 온 말인데, 신약성경을 기록한 언어인 그리스어의 숫자 알파벳에서는 99라는 수로 변환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속세와 초월적인 무한 사이의 경계 앞에서 인간의 기도가 신의 무한한 자비로움과 신비로움 앞으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상태를 의미하게 됩니다.


한편, 마태오 복음(18,12-14)의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의 비유처럼 9는 불완전함을 나타내는 동시에 어떤 한정된 범위에서는 가장 완전하고 가장 큰 수로 간주되어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밀턴은 그 유명한 실낙원을 통해 루치펠과 그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추락하는 데 9일이 걸렸다고 이야기하여 하느님의 자비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먼 거리를 우회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 벽화에는 창세기의 아홉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가장 유명한 아담의 창조에서 미켈란젤로는 하느님과 아담의 손가락을 닿을 듯 말듯하게 그려서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감을 휼륭하게 묘사합니다. 보티첼리는 낙원의 베아트리체와 단테를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있는 아홉 개의 원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9의 대표적인 상징으로는 갈라티아서(5,22-23)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를 언급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유럽의 삼포제 농업을 본 든 포도농사 방법을 시행하였는데, 6년간 경작한 후, 7년째는 안식하고, 8년째는 다시 심으며, 9년째는 8년째 심은 것을 먹으며 휴식한다고 합니다. 이 9년째 먹는 열매를 성령의 열매로 여겼습니다.


마지막으로 9는 심판의 수이면서 구원의 수입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과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와 함께 루카 복음(11, 11-19)의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신 기적 또한 구원에 필요한 참다운 지혜와 정신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병이 나은 열 사람 가운데 아홉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 없이 곧바로 자신의 옛 관습과 터전 곧, 과거의 속박으로 되돌아가 버리지만, 사마리아 사람만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되돌아오는 믿음과 지혜를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을 통해 사람의 지혜는 죄를 뉘우치는 데 있으며, 영혼의 지혜는 참된 하느님과 그 분의 진리를 사랑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아홉 달을 지내고 세상의 빛을 본 것처럼 우리는 회심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시 인간은 세 개의 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육안(肉眼)과 심안(心眼)과 영안(靈眼)은 우주의 본체이신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에서 거울의 역할을 합니다. 세속의 경계에 끄달리지 않도록 마음을 잘 살피면서 하느님을 바로 뵈옵는 그 날까지 양심의 거울을 잘 닦아가야 할 것입니다.


성과 속의 경계에 서서 영원한 자유와, 구원, 완성이라는 정점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에게 자비로우신 주님은 늘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엽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이사 49,15)


< 참고문헌 >

Michel Christiaens저, 장익 옮김(2002), 성서의 상징, 분도출판사. 
Michel Feuillet저, 연숙진 역(2004), 그리스도교 상징사전, 보누스. 
Otto Betz저, 배진아. 김혜진 역(2009). 푸른 영토.
명백훈(2006), 숫자 9 – 기다림과 수평선, 9월호.
한국문화상징사전편찬위원회, 한국문화상징사전 2, 동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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